이대 나온 여자
소설가이자 언론인 양선희 단편소설 작품집
세상이 지정해놓은 본류와 내 인생의 갈래 길,
그 어드메쯤을 헤매는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다?
사회·관습·문화…. 사람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살며, 세상이 가라고 지정해놓은 길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아는 그 본 길과 서로 경계선을 맞대면서도 어긋나는 수많은 갈래 길을 만듭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어나가는 그 갈래 길의 어드메쯤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대체로 세상이 이게 본류라고 지정한 길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갈래 길로 가거나 자신은 그 길을 열망하면서도 타자에게는 끝없이 본류만을 강요하기도 하지요.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세상의 입들은 나를 만류하고, 내 인생에 태클을 겁니다. 그렇다보니 인간으로 살고자 하면 외적인 것에 자아를 맞추느라 애쓰게 되고, 스스로 상처를 입기도 하지요. 본류와 갈래 길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내 이야기 같고, 안타깝습니다.?
『이대 나온 여자』는 현직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양선희 작가가 등단 10주년을 자축해 내는 작품집입니다.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여류(余流) 삼국지] (메디치), [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 등 중국 고대 전쟁 시기의 역사와 병법과 전략전술이 어우러진 선 굵은 소설을 많이 발표한 작가가 그려낸 현대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작품집은 모두 다섯 편의 작품으로 구성됩니다. 그동안 문예지 등을 통해 발표했거나 미발표한 단편 작품들로 글로벌 외환위기를 전후로 했던 21세기 초입 가장 역동적 시기였던 2010년을 전후해 쓰인 작품들입니다. 문학은 한 시대의 모습을 증언하는 것도 그 사명이기에, 그 시대를 그린 작품들도 작품집 안에 담아냈습니다.?
이대 나온 여자, 학벌이라는 허울에 갇혀 자신에게 닥친 불운 앞에서 숨어들기 바빴던 주인공. 옛 지주의 딸이 이 시대에 던지는 의문. 아빠 없이 태어난 비혼모의 딸, 동성애 아빠의 자녀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벤처투자로 스타가 되고 파생상품에서 몰락한 스타펀드매니저... 각자의 굴레를 갖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 속에서 나를 생각해 봅니다.
■나무를 그리는 화가 박신숙 작가의 나무 오브제
이 책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는 평생 나무만 그려온 화가 박신숙 작가의 나무 작품들의 선과 명암만을 따온 오브제입니다. 표지부터 각 장을 나누는 내지에 핑크색 톤으로 박 작가의 오브제를 담았습니다. 원작의 다채로운 색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선 터치의 강렬함과 빛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그림의 명암만을 따로 떼어 볼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대 나온 여자
이대 나온 신수진은 어쩌다 뚱보가 되었을까.
"넌 행복하지 않구나.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뚱뚱해지지 않아."
나는 이 생뚱맞은 말에 깜짝 놀란다. '행복'. 이런 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흘러간 지주
어느 날 엄마네 옛 땅의 소작농 아낙네가 이력서를 들고 찾아왔다.
나는 다시 긴 내리막과 많은 계단들을 내려간다. 아직도 내려가야 할 계단이 많은데 벌써 다리는 풀리고, 자꾸 눈물이 난다. 나는 원래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닌데, 남을 동정하느라 눈물이 날 리 없는데, 이 눈물은 참으로 뜬금없다?
■롱아일랜드 시티
나는 왜 DNA 나선 고리 한 쪽 끝의 주인에 집착하는가
‘엄마는 왜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내 출생이 궁금했을까. 사람도, 동물도, 지구에서 숨 쉬고 사는 물건들은 그냥 태어나져서 사는 것인데……. 개미도, 모기도, 파리도, 개들도, 원숭이도 모두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할까. 그런 걸 궁금해 하고, 캐고 다니지 않으면서도 다른 생명체들은 평화롭게 지구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내 안에 있는 유전자, 그 나선형 고리의 한 쪽 끝이 어디에 닿아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그 궁금증을 쫓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엄마를 들볶고, 압박했다.
■시장의 유령
스타 펀드매니저 신유종은 왜 그 밤에 춘천국도를 달렸을까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명성을 새로운 신용파생상품에서 파생시키려고 하는 중이라는 걸 말이다. 그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형 펀드상품을 개발하는, 성공적인 펀드매니저라는 명성을 포기하지 않는 터였다.
그 무렵 신문도, 일반 투자자들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는 친근한 상품인 양 신용파생상품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재테크를 잘 하는 아줌마들도 나보다 용감했고, 나보다 몇 걸음은 앞선 금융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 낯선 파생상품을, 금세 친한 친구처럼 받아들였다.?
■아빠의 연인
긴 헤어짐과 짧은 만남을 반복했던 아빠와 연인
바로 내가 아버지가 살아계신 내내 ‘당신은 떳떳하지 않다.’고 세상 사람을 대신해 끝없이 비난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들 눈을 의식하며 나 역시 떳떳하지 못했구나.나는 때로 아버지에게 대했던 내 행동으로 인해 나 자신을 속죄해야 하는 내 삶조차가 억울할 때가 있다. ?